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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사경득답 추천 여행지- 고양시 서오릉 이야기 명릉 -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 그리고 인원왕후 김씨
작성자 : 한재철 등록일 : 2023-02-14 조회수 : 106

명릉의 주인은 1392년 조선왕조가 탄생하고 가장 큰 시련의 시기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 선조 25~1598년 선조 31),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 인조 5).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12 28 ~ 1637 2 24일 인조 10)을 격으며 국내, 국제 정치적 혼란기를 지나 1674년 임금으로 등극한 숙종이다.

 

숙종의 왕 등극까지 역사적으로 복잡한 과정을 격었으며 재위기간 동안도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 했다 먼저 왕통과 관련하여 병자호란후 인질로 청나라로 압송되었던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 2 5 ~ 1645 5 21)와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1611~ 1646) 1645(인조 23) 8년만에 귀국후 두달도 안되어 갑자기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3명의 세손들이 있었으나 함께 인질로 잡혀 갔던 숙종의 아버지인 차남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숙종의 할아버지 봉림대군은 1645 9 27일 세자 책봉후 1647(인조 25) 부터 인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행하였고 1649 5 8일 인조의 붕어후 즉위했다. 효종(孝宗, 1619 7 3~ 1659 6 23, 재위: 1649 ~ 1659)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8년 음력 12 25 ~ 1674년 음력 2 24)1631(인조 9) 9 13일 가례를 올려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봉해졌다. 병자호란후 1637년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 8년간 인질 생활 하며 청나라군과 함께 명나라 정벌전쟁에도 참여하다 1644년 귀국했다. 심양의 질관(質館)에서 숙종 아버지 현종(顯宗, 1641 3 14 ~ 1674 9 17)을 낳았다. 숙종의 형제는 3왕자 6공주로 아버지는 조선왕 최초로 왕비 외에 후궁을 한명도 두지 않은 왕이기도 하다.



 

청나라에서 오랜 기간 인질 생활을 하며 청나라의 명나라정복 전쟁에 참전하며 국제적 감각을 체득한 효종은 임금 즉위후 10년간 불랑기포 제작등 국방에 많은 투자했다. 효종은 병자호란시 피난 갔다 포로로 잡혔던 강화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1652(효종 3) 강화의 성과 해자(城池)를 수축하고 행궁 건립하도록 했다.

숙종의 아버지 현종(顯宗, 1641 3 14~ 1674 9 17, 재위: 1659 6 28 ~ 1674 9 17)1649 5 13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651(효종 2) 11 21, 창덕궁 인정전에서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 1642 6 13 ~ 1684 1 21)와 책빈례를 거행하고 왕세자빈에으로 책봉했다. 효종은 조카들이 있었으나 인조의 지명으로 둘째인 자신이 왕되어 정통성 시비가 생겨 날 수 있어 조선왕조 최초로 인선왕후 장씨외에는 후궁을 두지 않아 후임 왕권분쟁의 요소를 제거 하고 즉위 하자마다 세자를 책봉했다.

 

조선은 성리학을 기본 이념으로한 철저한 신분사회로 왕조의 규례는 항상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어 모든 과정을 기록하고 전례를 만들어 따르게 했다. 왕과 신하는 늘 긴장관계속에서 국정을 운영하였다.

 

할아버지가 인조 반정으로 왕위에 즉위하고 또 조카들 대신 왕으로 즉위했던 아버지 효종 이어 왕위에 오른 현종은 이러한 정치적 환경속에서 15년간 강력한 기득권을 구축했던 신하들 특히 송시열등과 협력 또는 경쟁하며 조선을 이끌었다.



 

특히 예송(禮訟)논쟁을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숙종 아버지 효종 승하시와 1674년 숙종 어머니 인선왕후의 사망을 비롯한 총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인조 계비(繼妃) 자의대비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 1624 12 16 ~ 1688 9 20)가 살아 있어 배다른 아들 효종과 며느리의 복제가 결정적인 쟁점이 되었기 때문에 복상문제(服喪問題)라고도 부른다.

현종실록에는 즉위하고 40세에 붕어한 아버지 효종 국상과 관련발생한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 불리는 역사적  기록이 나온다. 1659(현종 즉위) 54일 효종 국상에 남인 학자였던 윤휴()는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족이 3년 참최복(斬衰服)을 주장하지만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의 서인은 주례(周禮), 의례 (儀禮) 주소(註疏) 사종설(四種說) 체이부정(體而不正: 서자가 계승한 경우)

5 5 시열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대명률(大明律)》 및 국제(國制)장자와 중자를 막론하고 모두 부장기(不杖朞)로 한다고 하였으니, 이를 근거로 결정하는 것이 또한 좋겠다."

하니, 정태화는 좋다 하고 곧 전거를 찾아냈다. 송시열이 《상례비요(喪禮備要)》에도 이 말이 실려 있다고 하면서 즉시 가져다가 그 인용한 대명률과 국제의 부장기 조항을 지적하였다. 정태화가 몹시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그 근거를 찾아냈으니 걱정이 없을 것 같다." 을 들어 1년 기년복(朞年服)을 주장 관철시킨다.

 

또한 송시열 관련해 효종의 관을 만드는데 길이가 마땅한 재목이 없자 이어붙인 부판으로 된 재궁 왕의 관 재궁을 만들려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원상 정태화의 마음에는 선왕은 저버릴 수 있어도 이조 판서 송시열은 거스를 수 없다고 여긴 것이 아니었겠는가. 비열한 인간이 행여 지위를 잃을세라 걱정하는 꼴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그의 죄를 논하기로 들면 송시열보다 덜할 게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를 황각(黃閣-의정부 3정승)에다 30년씩이나 두고 그의 말대로만 따랐으니, ,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빨리 목수를 골라 오늘밤 안으로 널 속면과 칠성판(七星板)을 만들되, 여러 번 옻칠을 해야 할 것이다." 현종실록 1659 5 6

 

이처럼 숙종 아버지 현종은 즉위 하면서 부터 정통성 관련해 송시열을 비롯 기득권 정치집단의 견제를 받으며 국정을 이끌어야 했다. 그러나 현종은 세자 책봉후 10년 가까운 기간동안 그리고 8년간 청나라 인질 기간 태어난 경험과 효종의 정치를 보고 배우며 국정운영의 기술을 습득한 왕으로 15년간 조선왕조를 이끌었다. 특히 현종은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강화도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660(현종 1) 11 8일 강화도의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새로이 사고(史庫) 마련

1664(현종 5)  강도 어사(江都御史) 민유중이 돌아와서 강도의 미곡(米穀)과 군기(軍器)의 숫자를 아뢰었다  호조에서 이송한 은() 1 3천 냥 보관
1665
(현종 6)등서()한 역대 실록을 보관,
1665
(현종 6) 현종 6 5 8 통제사 정부현(鄭傅賢)에게 불랑기(佛狼機) 50, 정철자포
(正鐵子砲) 200문을 만들어 강화도 배치

1674(현종 15) 현종의 어머니 이자 효종 왕비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8년 음력 12 25 ~ 1674년 음력 2 24)가 죽자 갑인예송(甲寅禮訟)으로 불리는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또 복상문제(服喪問題)가 발생한다.

또 송시열은 맏며느리는 1년 기년복인데 효종이 장자가 아니니 인선왕후도 맏며느리가 아니라는 명분으로 9개월짜리 대공복(大功服)만 입어도 된다고 주장했다. 현종은 아버지인 효종이 붕어 했을 때는 아들에 대해서 《국조오례의》 기년복제를 주장해 적용 했는데 썼는데 어머니 인선왕후에 대해서는 《주례》·《의례》를 따라 대공복제를 주장 적용하라니 일관성이 없다는 논리로 서인의 주장을 반대 기년복제로 1674년 현종 15 8 1일 개정하고 서인들을 처벌했다. 현종은 어머니 상중에 병이나 1674 8 1833세의 나이로 붕어 한다.

 

현종 외아들로 자란 명릉의 주인공 숙종(肅宗, 1661 10 7~ 1720 7 12, 재위: 1674 9 22 ~ 1720 7 12)13세에 보위에 오르기 까지의 과정이 위와 같다. 1667 1 22 ~ 1674 8 23일 약 7년간의 세자 수업을 받고 즉위하여 45년간 장기집권한다.



 

1671(현종 12) 3 22일 서인의 영수인 김장생의 손녀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 1661 10 25 ~ 1680 12 16) 세자비로 간택 숙종 2년에 책비례를 마치고 왕비로 책봉 공주 2명을 낳았으나 금방 죽었고 본인도 천연두고 갑자기 죽었다. 고양시 서오릉 이야기 익릉- 숙종 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씨 참고.

 

정비 인경왕후 승하 1년후 송시열의 추천으로 1681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 5 15 ~ 1701 9 16)를 첫번 계비로 책봉한다. 숙종과 사이에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숙종이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11 3 ~ 1701 11 9)와 사이에 낳은 아들(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서인 송시열등 신하와 왕과 대립한 기사환국으로 남인지 집권하며 폐서인으로 출궁당했다 1694년 갑술환국시 다시 왕비로 복권되며 희빈 장씨는 다시 빈으로 신분이 바뀌게 된다. 그녀는 죽기전 1년간 투병을 하다 1701(숙종 27) 9 16일 요양하던 창경궁 경춘전에서 숙종과 사이에 자식을 두지도 못하고 34세로 숨을 거둔다. 죽어서는 숙종옆 명릉에 묻혔다.



 

인현왕후의 승하 1년후 1702(숙종 28) 10 3일에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1687 11 3 ~ 1757 5 13)15세의 나이로 41세 숙종의 두 번째 계비로 책봉되었으나 자식을 낳지 못했다.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재위 1720 6 13 ~ 1724 8 25)이 즉위후 숙종과 희빈 최씨 사이에 낳은 영조를 1721년에 양자로 입적해 왕세제로 등극시켰다. 경종이 잛은 재위기간과 자식없이 승하하고 정조가 왕으로 즉위하며 영조와 며느리인 정성왕후의 효도를 받으며 잘 살다가 1757 5 13일 창덕궁 영모당에서 69세로 승하했다. 영조는 친히 묘자리를 잡을 때 우측이 높고 좌측이 낮은 원칙도 무시하고 왕릉인 명릉 숙종와 인현왕후 우측 건너편 언덕에 인원왕후의 능을 단릉으로 조성하고 한 전각에서 같이 배향하게 했으며 비각도 영조가 친필로 정성 들여 썼다.



 

숙종은 왕비 3(정비, 1계비, 2계비), 4, 귀인 1, 소인 1명등 왕통을 잊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으나 왕비들과 사이에서는 왕자를 얻지 못했다.

 

인경왕후 김씨 사이에 1677년 첫 딸과 1679년 둘 째 딸을 얻었으나 요절 하였고 1688년 희빈 장씨 사이에 경종 그리고 숙빈 최씨와 4명의 왕자를 생산 했으나 연잉군(영조)만 살아 남았다. 명빈 박씨와 연령군을 낳았다.

 

숙종은 나이 13세에 즉위 하였으나 명성왕후의 수렴청정을 거부하고 친정하였다. 국내 정치적으로 환국정치로 불리는 집권세력을 흔드는 방식으로 왕권을 강화 하였다. 집권 초기 거목이던 송시열을 1675(숙종 1)부터 5년간 함경도 덕원(德源) 및 경상도 장기(長鬐) · 거제(巨濟) 등에 유배 보내며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 나갔다.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숙종 6)  3 28일 영의정 허적이 할아버지 허잠의 시호(諡號) 잔치연에 궁궐 유악(油幄,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칠한 천막)을 왕의 허락없이 가저다 쓴 것이 발각되었어 이어 4 5일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종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삼형제와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이 들어 오자 관련자들과 허적 사사 경신지옥(庚申之獄) 남인->서인으로 정권 교체 송시열 복권

 

기사환국(己巳換局)은 조선 숙종 15(1689) 장희빈의 아들 경종을 원자로 하는 문제로 반대하던 송시열 전라도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서인->남인 정권 교체

 

갑술환국(甲戌換局) 1694(숙종 20) 우의정 민암(閔黯)이 서인들이 정치자금 은화(銀貨)를 모아 정국의 전환을 도모하고 여러 사대부와 더불어 궁중 왕실에 뇌물로 통하였다고 꾸며대고 장희빈에 의해 쫒겨난 폐비 민씨(閔氏 : 仁顯王后)도 자금을 대 복위를 음모한다고 참가자 함이완(咸以完) 고변사건(告變事件) 발생하였다. 민씨는 복권 되고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당했다. 숙빈 최씨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남인-서인으로 정권 교체

 

8년을 청나라에서 인질로 보낸 할아버지 그리고 심양에서 태어난 아버지 현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숙종은 외교 정치에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와 협상하여 1712년 함경감사 이선부로 하여금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를 세워 청나라와 조선 간의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기도 했으며, 폐한지로 버려 둔 압록강변에 무창·자성의 2진을 신설하였다.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에도 막부 정권으로 하여금 조선 영토인 울릉도. 우산도(독도)에 왜인들의 출입 금지약속을 받아 내고 통신사를 세 차례나 파견(1682, 1711, 1719)하여 왜은 사용 조례를 확정함으로써 왜관 무역을 정비시켰다.



 

국방력 강화에도 많은 투자를 하여 숙종 4 1678 12 1, 김석주(金錫胄, 1634~1684)의 주관으로 강화도 돈대 축조를 시행하였다. 1679 5 23 48개의 돈대가 축조되고, 공사에 참여한 인원은 총 14,000여 명이었다. 석수 400, 승군 8,000, 어영군 4,262, 기타 조역 1,500, 그리고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인 야장(冶匠), 나무를 다루는 목수(木手) 등이 투입되었다. 이후 추가로 돈대가 축조되어서 현재 54개의 돈대가 강화도에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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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여린 숙종은 금손이라 부르는 길고양이를 하나 키웠는데 부르면 어디에 있든지 바로 뛰어와 숙종의 무릎에 앉아 숙종이 주는 음식을 받아 먹으며 지내다 숙종이 죽자 금손도 먹던 고기 마저 안먹고 시름시름 앓다 죽자 신하들이 숙종 곁에 묻어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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